탄소중립·경제안보 시대 한국 원자력의 길

이유호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교수

모든 시스템에는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 기술과 부품이 있다. 자동차에는 엔진이 그러하고, 컴퓨터로 치면 CPU가 그러하다.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원자로심 (原子爐心), 그리고 그 안에서도 원자핵이 분열되고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연료가 단연코 핵심 부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핵연료는 원자력발전소의 심장과도 비견될 수 있다. 핵연료 기술을 관조할 때 비로소 원자력 기술의 본질을 이해 할 수 있고 원자력 발전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탄소중립의 시대를 맞아 원자력 에너지가 다시 뛰고 있다. 대한민국의 원자력 기술 경쟁력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마땅히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핵연료가 원자력발전소의 성능에 미치는 영향, 세계 핵연료 개발 동향, 우리나라의 현주소, 원천기술의 중요성,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해 먼저 핵연료가 원자력 발전소의 성능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해 보자.

 

값비싼 원전에서 값싼 전기가 생산되는 경이로움

원자력발전소가 값싼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놀라운 사실일 수 있다. 당장에 원자력발전소에 들어가는 것 중 값싼 것이 없다. 높은 안전성을 위해 원자력발전소의 모든 부품들은 고급으로 잘 만들어 져야 한다. 흔한 전선 하나도 여러 시험을 거쳐야 도입 할 수 곳이 원자력발전소이다. 뿐만 아니라 원자력발전소에는 많은 안전보장 중복 설비가 들어간다. 자동차로 치면 고급 에어백을 혹여나 있을 수 있는 고장까지 생각하여 여러 개를 설치하는 것이다. 특히, 원자력 발전소의 콘크리트 격납용기와 같은 대형 안전설비는 다른 에너지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인력 역시 저렴하지 않다. 원자력 에너지는 흔히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라고 한다. 발전소 운용과 관리는 높은 수준으로 훈련된 전문 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원자력 전기 균등화발전비용은 53.3 USD/MWh, 석탄 (75.6 USD/MWh), 가스 (86.8 USD/MWh), 상업용 태양광 (98.1 USD/MWh), 풍력 (해상 161 USD/MWh, 육상 140 USD/MWh)에 비해 상당히 저렴하다 (국제에너지기구 IEA, Projected Costs of Generating Electricity 2020 Edition). 어떠한 원리로 잘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는 값싼 전기를 공급할 수 있을까 ?

 

첫 번째 비결은 값싼 핵연료에 있다. 모든 것이 비싼 원자력발전소에서도 핵연료 값은 저렴하다. 이는 원자력 발전이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동한다. 핵연료 비용은 원자력 발전단가의 15%만을 차지한다. 연료비가 발전단가의 80%를 차지하는 화력발전과는 큰 차이가 있다. 저렴한 핵연료 가격은 높은 핵에너지의 밀도로부터 기인한다. 연료 1kg으로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원자력이 화력에너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에 연료 발전단가가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핵연료가 화석연료처럼 비쌌더라면 원자력 발전을 이용한 전력생산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원전 산업계는 핵연료를 개선을 통해 연료 에너지 이용률을 꾸준히 증진시켜 연료 발전단가와 사용후핵연료 배출량을 감소시켜 왔다. 오늘날 핵연료 1kg에서 추출할 수 있는 에너지는 1980년대에 비해 50% 가량 높은 수준이고, 이를 더욱 증진시키려는 연구 개발이 진행 중이다.

 

저렴한 핵연료, 높은 출력밀도와 규모의 경제성, 높은 가동률이 비밀

두 번째로 비결은 원자력발전소의 크기와 출력 밀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산업계는 원자력 발전소를 밀도 있게 크게 지어 규모의 경제 효과를 극대화해 왔다. 원자력발전소의 평균 설비용량은 1000 MWe 수준으로 석탄 및 가스 발전 (600-700 MWe), 태양광 (대형 유틸리티 규모: 26 MWe, 상업용: 0.25 MWe), 해상풍력 (186 MWe)을 위시하는 타 발전원에 비해 확연히 크다 (국제에너지기구 IEA, Projected Costs of Generating Electricity 2020 Edition). 단순히 크게 짓기만 해서는 한계가 있다. 밀도가 높아야 비용 절감 효과를 제대로 구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원자력발전소는 노심 안에 수많은 핵연료봉을 빼곡히 배치되는 설계를 구현한다. 원자력발전소의 노심 내부의 1세곱cm 공간에서는 약 100 W의 열에너지가 생산된다. 이는 다른 발전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출력 밀도이다. 이러한 높은 출력 밀도 구현에 원자력공학의 정수(精髓)가 담겨 있다. 주목할 점은, 핵연료의 성능향상을 통해 원자로의 출력 밀도를 점진적으로 증가시켜 왔다는 사실이다. 원자력 산업계는 더 얇지만 튼튼하고 부식도 덜 되는 핵연료를 개발 및 도입하여 원자로심 내 장전 핵연료봉 수를 늘리는 방법을 통해 출력 밀도를 증진시켜 왔다.

그림. 높은 출력밀도 구현을 위해 원자로 노심에는 수만개의 얇고 긴 핵연료가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고 핵연료 중심 온도는 섭씨 1000도 이상을 유지한다. 
그림. 높은 출력밀도 구현을 위해 원자로 노심에는 수만개의 얇고 긴 핵연료가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고 핵연료 중심 온도는 섭씨 1000도 이상을 유지한다. 

 

규모의 경제 효과는 발전 설비용량 당 필요한 자원의 양에서 보여 진다. MIT에서 발표한 결과 (The Future of Nuclear Energy in a Carbon-Constrained World, 2018)에 따르면 원자력 발전소 (AP-1000 노형 기준)1MWe 설비용량 당 각 약 25톤의 철강·금속과 약 70㎥의 콘크리트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석탄 발전소가 설비용량 당 필요로 하는 자원의 양보다 적다 (철강·금속 ~110 MT/MWe, 콘크리트 ~180㎥/MWe). 안전 설비들로 무거워진 원자력 발전소가 필요로 하는 자원의 양이 적다는 것이 놀랍다. 줄어든 필요 자원의 양은 원전 건설에 필요한 직접비와 간접비를 효과적으로 낮춘다. 이는 안전 관련 추가 비용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소가 경제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비결로 작용해 왔다.

소형모듈원자로 (Small Modular Reactor, SMR)는 이러한 관점에서 기존 원자로 경제성 확보 문법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형이라 함은 설비용량 300 MWe 이하의 원자로를 지칭하는데, 이는 기존의 대형원전이 누려온 규모의 경제를 일정부분 포기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소형 원자로에서는 중성자의 손실이 증가하여 연료 이용률이 대형원전이 비해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핵연료 비용도 대형원전에 비해 저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위시한 세계 각국에서 SMR 개발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이유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대형 원전 건설 시장의 몰락과 연관이 있다. 미국은 대형 원전을 경제적으로 건설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써머 (Summer) 2·3호기는 착공 후 5년 만에 건설비가 급격히 상승한 이유로 2017년에 중단 되었다. 얼마 전 첫 임계 (critical)에 도달한 보글 (Vogtle) 3·4 호기는 엄청난 공기 지연과 이에 따른 건설비 폭증으로 이미 경제성을 상실했고, 몰락한 미국 대형 원전 산업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프랑스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는 않다. 자국 내 원전건설과 해외 (핀란드) 원전건설 사업 모두 10년 이상의 건설 공기지연과 비용증가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형 경수로 건설 능력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대형원전 시장 몰락한 미국, SMR에서 돌파구 찾아

재가 된 땅에 새로운 싹이 난다 하였다. 대형 원전시장의 몰락은 미국으로 하여금 원전 산업을 민간 SMR 개발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체계로 재편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원전을 작게 공장에서 만들어 그간 서방의 대형 원전 산업을 괴롭혀왔던 건설공기 지연 문제와 비용에 관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데 SMR의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SMR은 민간자본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고 나아가 기업가 정신이 담긴 원자력 에너지를 구현해 낼 것으로 기대된다. 이 과정 중에 안전성도 향상 될 수 있다고 하니 금상첨화이다.

평단가가 저렴하단 이유로 80평 대형 아파트만 공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대형 노형 일변도의 원전 시장일 수 있다. 25평 아파트의 평단가가 80평짜리 아파트의 평단가 보다 저렴하기는 쉽지 않다. 규모의 경제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가격에 공급된 신축 소형 아파트는 인기가 많다. SMR도 이와 같을 것이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SMR의 경제성을 제고하는 과정에서 핵연료 이용률 및 출력밀도 증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 확보의 세 번째 원리는 원전의 높은 가동률에 있다. 원자력 발전소는 수명이 정해져 있다. 멈춰 있다고 수명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발전단가에서 연료 비중이 15%로 낮기 때문에 멈춰 있어도 연료를 제외한 나머지 85%의 비용은 나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원자력 발전소는 한번 지으면 필요한 유지·보수·점검과 핵연료 교체기간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쉬지 않고 가동을 해야 경제성이 확보된다. 고장이 없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는 10일중 8.5일은 최대출력으로 정상 가동 한다. 나머지 1.5일 정도는 핵연료 교체 및 보수점검을 위해 원전을 세운다.

 

핵연료 기술의 정교함: 10만 개 연료 중 1개 꼴로 결함

높은 가동률의 이면에는 튼튼한 핵연료가 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핵연료는 가장 가혹한 환경에 놓여있기에 다른 부품에 비해 고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핵연료가 고장이 나면 원전을 멈춰야 하고 이는 즉각적으로 원전 가동률을 낮춘다. 일례로, 1980년대 초 상업용 원자로의 국제 평균 가동률은 ~60%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10일 중 6일만 전력생산). 잦은 핵연료 고장이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핵연료 재료와 운영 개선을 통해 오늘날의 85-90%에 육박하는 가동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가동원전에서는 10만개의 핵연료에서 하나 정도의 결함이 발생한다. 이 경이로운 수준의 신뢰도 뒤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핵연료 재료 및 가동조건 최적화 기술이 있었다.

그림. (좌) 세계 원전평균 가동율 (World Nuclear Association) (우) 세계 평균 핵연료 결함 빈도 (K.A. Terrani et al. / Journal of Nuclear Materials 448 (2014) 420-435)
그림. (좌) 세계 원전평균 가동율 (World Nuclear Association) (우) 세계 평균 핵연료 결함 빈도 (K.A. Terrani et al. / Journal of Nuclear Materials 448 (2014) 420-435)

설명한 에너지 밀도, 출력 밀도, 가동률증진은 원전 경제성 증진의 문법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핵연료 기술이 있다. 원자력 발전의 원천적인 성능 증진 생각할 때 핵연료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자력 발전의 한계 돌파형 혁신기술은 핵연료로 부터 시작된다.

오늘날 탄소중립과 경제안보의 시대에서 원자력 기술은 도약의 기회를 맞이했다. 전 세계적으로 가동 원전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원천적으로 증진시키고 동시에 혁신적 미래형 원자로를 개발해 보고자 하는 진정성이 오늘날처럼 높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력 기술 혁신의 진정성은 자연스레 기술 도약의 핵심이 되는 핵연료 연구에 서려 있다.

일례로 미국은 가동 원전의 성능 혁신을 목표로 농축도 6% 소결체가 장입된 사고저항성핵연료 (ATF) 상용로 연소실험을 시작했다. 상업용 경수로에서 5%를 초과하는 농축 우라늄을 연소시키는 것은 처음이다. 위 실험은 본격적인 HALEU (High Assay Low Enriched Uranium, 고순수 저농축 우라늄: 농축도 5-20%)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사고저항성핵연료는 안전 여유도를 희생하지 않으면서 연료 이용률을 증진 시키고 나아가 출력밀도까지 증진시킬 수 있는 기술로 이해할 수 있다. 기존의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 확보 문법을 강화하는 원리이다. 훗날 경수 형 소형모듈형원자로 (SMR)이 위 연구개발의 성취를 향유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차세대 원자로 개발은 더욱 급진적인 한계 돌파형 핵연료 기술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빌게이츠가 창업한 테라파워가 개발 중인 나트륨 (Natrium) 원자로는 핵연료 이용률을 대폭 증가시켜 사용후핵연료 배출량을 혁신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나트륨 원자로 실현의 핵심 난제는 핵연료 재료에 있다. 고속 중성자를 활용하는 나트륨 원자로는 기존 경수로 대비 수십 배에 달하는 방사선 조사 데미지를 핵연료에 가한다. 관련한 핵연료 재료 설계 및 성능평가 기술 개발이 필수적이다. 높은 전기생산 효율을 가지며 수소 생산까지 가능한 고온 가스로는 보다 높은 온도에서 작동할 수 있는 핵연료를 필요로 한다. 고온 가스로를 개발하는 X-Energy 사는 세라믹 입자기반의 차세대 TRISO 핵연료를 원자로와 함께 개발하고 있다. 차세대 원자로 중에는 액체 핵연료를 사용하는 원자로도 있다.

 

우주 추진선 핵연료는 섭씨 2000도 고온 견뎌내도록 설계

미국 항공우주국 NASA에서는 우주선 추진용 원자로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데, 기술 실현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난제가 핵연료에 있다. 우주 추진선의 핵연료는 섭씨 2000도를 웃도는 고온을 견뎌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존 핵연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핵연료가 고안되어야 한다. NASA에서는 다양한 핵연료 설계를 직접 만들어 테스트 해 보고 독립 설계검토 팀 (Design Independent Review Team, DIRT)을 운영하여 실현 가능한 핵연료 후보군을 선별하는 연구개발을 진행 중에 있다. 논문에만 존재하는 종이 (paper) 핵연료가 아니라 실물 핵연료를 만들어 보고 실험해보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로 시각을 돌려보자.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경수로 기술을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이전받아 국산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나아가 독자 노형인 APR-1400을 개발하여 UAE에 수출까지 하였는데 이는 원자력 후발주자국가 중 전례가 없는 성공이다. 경수로 기술 국산화는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 개발사에 있어 가장 주요한 화두이자 시대정신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원자력 기술 경쟁력의 근간이 되었다.

이 과정 중에 처음부터 새로운 핵연료를 고안하고 개발할 필요 까지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핵연료 원천기술개발은 기술 종주국의 몫이었고, 우리는 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았다. 그 결과, 경수로 기술을 국산화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원자력 기술 종주국의 핵연료를 상수 (常數)로 받아들이는 전략적 선택을 하게 된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숙제 문제를 받은 학생이 오늘 기초체력을 쌓기 위해 운동장에 가서 뛰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이제까지는 위와 같은 패스트 팔로워 (Fast follower)’ 전략이 유효하게 작동했다.

 

해외에서 핵연료 기술이전 받아 국산화시키는 시대 지나가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미국이 한국의 원자력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국의 대표 원자력기업인 웨스팅하우스는 미국 법원에 대한민국의 APR-1400 이 자사의 설계를 기반으로 개발되었음을 주장하며 미국 법원에 한수원의 원전 수출 금지 소송을 제기하였다. 한수원이 수출을 위해서는 미국 에너지성 (DOE)과 웨스팅하우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한수원의 해외 진출에 대한 강력한 견제구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성공적인 UAE 원전 수출이 도화선이 되었고 최근 추진하고 있는 폴란드 원전 수출이 불을 집혔다. 미국이 대한민국을 원자력 수출의 경쟁 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배경에는 세계 원전 시장을 독식하고자 하는 미국의 의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동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강화, 그리고 웨스팅하우스의 원전 건설 능력 상실에 기인한 미국의 불안감이 복합적으로 작동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웨스팅하우스가 문제를 삼는 점은 우리나라의 APR-1400이 자사의 시스템 80과 시스템 80+의 설계를 토대로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몇 가지 특정 요소 기술의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아니라 포괄적인 설계를 이야기 하며 수출통제 위반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이 이번 소송의 성격을 보여준다. 애초에 오롯이 기술문제에 기반 한 분쟁이 아닌 우리나라의 독자 수출을 막고자 하는 저의가 분명해 보이는 분쟁이다.

웨스팅하우스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소송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979년 스리마일섬 (Three Mile Island) 원전사고 이후 미국의 원자력산업이 사양길에 들어서며 웨스팅하우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해외사업을 통해 명맥을 이어왔다. 2006년에는 급기야 일본회사인 도시바에 매각되었고 2017년엔 파산보호신청 후 캐나다 사모펀드 회사인 브룩필드 비즈니스파트너스에게 인수되었다. 최근 브룩필드 비즈니스파트너는 웨스팅하우스 지분 49%를 캐나다 우라늄 업체 카메코에 인수당시 가격에 비해 월등히 높은 가격으로 매각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수원 소송 건을 사모펀드의 웨스팅하우스 시장가치 극대화 전략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웨스팅하우스는 이미 폴란드 정부 주도의 가압경수로 6기 건설 사업을 수주했다. 웨스팅하우스가 문제를 제기한 사업은 한수원이 추진하고 있는 원전 2기를 건설하는 폴란드 민간기업 주도의 사업이다. 또한 소장에는 한수원이 추진 중인 체코와 사우디아라비아 원전 수주 사업에 대한 수출 통제를 언급하며 전 방위적으로 견제구를 날렸다. 이런 극단적인 실력 행사는 기업매각을 위한 사모펀드의 몸값 올리기 전략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현 상황을 일개 민간기업의 이례적 소송으로 치부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이러한 소송을 앞두고 웨스팅하우스과 미국 에너지성 (DOE) 사이에 사전 논의가 없었을 리 없다. 미국 에너지성 (DOE) 입장에서는 웨스팅하우스를 앞세워 국가 간의 분쟁으로 위 문제를 격상시키지 않으면서 대한민국의 원전수출의 김을 빼는 효과를 노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웨스팅하우스, 한국의 UAE 원전 수출 때 지적재산권 문제 삼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송의 원만한 해결을 예상해 볼 수 있는 근거들이 있다. ·미 소송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 될 경우 결국 러시아와 중국에만 좋은 일이 될 것이 라는 인식을 미국도 공감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도 성공적인 해외 원전건설이 한국의 원전기기 공급 도움 없이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슷한 일이 과거 UAE 원전수출 때도 있었다.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2009년 아랍에미레이트 (UAE)에원전 수출 사업을 진행할 때 지적재산권을 문제로 삼은 전적이 있다. 당시 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에 기술 자문료를 지급하고 웨스팅하우스 (도시바)를 한국전력 컨소시엄에 참여시키며 미국 측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래도 남는 장사였다. 앞으로도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적절한 수준에서 미국과 이익을 나누며 실리를 챙기는 방향으로 원전수출이 진행 될 수 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원자력 기술에 대한 미국의 실력 행사와 강화된 자국 기술보호 움직임이 비단 원전 수출에서만이 아니라 연구개발 R&D 에서도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는 점은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최근 미국의 에너지성은 원자력 분야의 주요 컴퓨터 프로그램 소스코드 공개를 금지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주요 원자력 시설을 활용하는 실험 연구 개발 협력도 어려워졌다. 이러한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의 신형 원자로 기술의 약진이 미국을 적잖이 자극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미국은 원자력 분야에 관한 모든 중국과 러시아와의 기술협력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철저한 원천 기술 보호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상황은 그간 대한민국 원자력 기술개발이 고수해온 패스트팔로워 (Fast follower)’ 전략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미 원자력 협력을 강화하여 눈앞에 펼쳐진 수출시장에서의 실리를 챙기는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차세대 원자력시스템 원천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후발주자를 자처하고 기술을 해외에서 이전받아 국산화 시키는 전략은 실효를 다했다. 이제는 원천기술 개발에 방점을 찍는 R&D를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제부터는 핵연료 재료를 원자로 기술개발 초기 단계부터 핵심 기술로 인식하고 원천기술 축적에 진정성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 원전기술의 독립성을 높이는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는 핵연료 기술이 대한민국의 차세대 원전 개발 있어 가장 중요한 변수 (變數)로 작용할 것이다. 경수로 기술을 체화하고 국산화하는 과정을 거치며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 연구 개발에는 기술 추격형 DNA가 자리 잡았다. 이를 넘어서 기술 선도형 연구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핵연료부터 건드려봐야 한다.

 

자체 핵연료 조사용 실험로만들어야…현재 러시아에 의존 중

당장 기반 시설이 큰 문제다. 우리나라에는 핵연료 조사용 실험로가 없다. 우리나라 수준의 원자력 전력생산 규모를 가진 나라 중 조사용 실험로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는 굉장히 이례적이다. 이는 대한민국 원자력 기술의 경쟁력과 독립성을 심각히 저해하는 원인으로 이미 작용하고 있다. 신형 핵연료 상용화에 필요한 인허가 신청을 위해서는 연구로 연소실험이 요구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비싼 돈을 들여 러시아 연구로에 핵연료를 보내 시험을 해야 하는 하는 실정이다. 해외에서 핵연료 조사실험을 수행할 경우 인허가 신청에 필요한 데이터는 확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관련 원천기술을 축적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실험을 대신 해주는 경쟁 국가에는 무형 (無形)의 경험과 기술력이 축적된다, 우리 비용으로. 이뿐만이 아니다. 시험 일정과 데이터의 양과 질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상당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기술 유출도 없으리라 확신하기는 힘들다. 원자력을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정작 우리나라에는 핵연료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변변찮은 시설이 하나 없어 경쟁국에 핵연료를 보내 시험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 대한 통렬한 문제의식 없이는 핵연료 원천기술 개발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그림. 미국 아이다호 국립연구소의 Materials and Fuels Complex 
그림. 미국 아이다호 국립연구소의 Materials and Fuels Complex 

 

몇 년 전 미국 원자력 연구의 본산인 아이다호 국립연구소 (Idaho National Laboratory)Materials and Fuels Complex (MFC)를 방문 한 적이 있었다. 아이다호 국립연구소 메인 캠퍼스로부터 고속도로를 타고 30분 이상 운전을 해서 다다른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위치한 위 시설 부지에서는 1365일 쉬지 않고 시험용 핵연료를 만들어보고 나열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시험을 하고 있었다. 핵연료의 기초 물성 하나하나를 스스로 측정하고 쌓아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미국 원자력 원천기술의 뿌리를 엿볼 수 있었다. INLMFC과 같은 시설이 우리나라에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국내 핵연료 연구시설 확충을 위해 필요한 작은 준비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기술 선도형 원자력 기술개발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실물 핵연료 연구가 강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핵연료를 핵심 기술로 인식하고 원천기술 축적에 진정성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탈원전의 시기를 지나 대한민국 원자력 기술은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이했다. 이 시기를 빌어 핵연료 연구를 위한 기반확충에 필요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서울=지구와 에너지

저작권자 © 지구와에너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